처음에는 스리랑카, 버마 등지에도 아쇼카왕의 진신 사리탑이 세워졌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런 곳은 인도와 매우 가까운 곳이어서 실제로 진신사리가 전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거기서 더 확대되어 실크로드를 따라 감숙성, 섬서성 등지로 확대되더니 급기야는 중국의 가장 동쪽 끝인 요동성에서도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이 요동성의 아쇼카왕 탑에서 진신 사리를 찾아낸 것은 고구려 왕이었다는 기록도 덧붙여졌다.
일반적으로 마하보디 대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건축은 사리 대신 불상이 모셔진 마하보디 사당이다. 하지만 이러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전역에 세워지기 시작한 사찰들에 세워진 탑을 채울 진신 사리를 구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리를 중심으로 하는 불탑 신앙보다는 동아시아 전통의 사당 제사를 반영한 법당이 점차 사찰의 중심으로 발전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신주에 해당하는 불상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인도에서도 사당의 개념은 있었다. 브라만교의 신들, 즉 브라만이나 비쉬누, 쉬바 같은 신들은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고, 단지 이들의 상징을 봉안하는 사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진신사리라는 분명한 숭배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스투파를 사원과 예불의 중심으로 계속 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에서도 예외적으로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당만은 예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흔히 ‘마하보디 대탑’이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리가 봉안된 탑이 아니라, 불상이 봉안된 사당이다. 이 사당은 부처님의 몸을 기리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것보다도, 그 장소성, 즉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라는 점이 더 강조되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탑으로 볼 때와 사당으로 볼 때의 시각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탑으로 볼 때는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복을 짓는 것이 목표이지만, 사당으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사당에 강림하시길 기원하며 이를 통해 배움을 얻어 우리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표가 된다.
이처럼 불탑과 법당, 무덤과 사당의 관계를 문화적으로 이해하면 각각의 장소에서 우리의 마음가짐도 더 분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