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11월호

문화로 읽는 불교 6

불탑과 불상

- 주수완 / 우석대학교 교수 -

page 법당 중심의 사찰. 순천 송광사에는 아예 탑이 없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부처님의 사리 모신 불탑은 무덤, 법당은 사당

한국이나 중국, 일본의 사찰에서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이에 반해 법당 앞에 세워진 불탑은 마치 법당을 꾸며주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로는 중심 공간에서 약간 밀려나 있기도 하며, 종종 불탑이 없는 절도 발견된다. 불탑이 없는 절은 있어도 법당이 없는 절은 상상하기 어려운 만큼 사찰에서는 법당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인도나 파키스탄의 옛 불교 사원지를 다녀보면 불상보다 불탑이 압도적으로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와는 반대로 인도에서는 오히려 불상이 탑을 꾸며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앞선 글에서 당시 부처님에 대한 공양이 인도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리고 부처님 열반 후에는 그 역할을 탑이 대신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렸다. 그래서 인도에서 이처럼 탑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공감하시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왜 불상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page 불탑(스투파) 중심의 인도·간다라 사원지. 파키스탄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사원.

동아시아에서는 돌아가신 분의 무덤도 물론 중요했지만, 사당이라는 것을 만들어 무덤과는 상관없이 수시로 제사를 지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무덤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불탑에 해당하고, 사당은 불상을 모신 법당에 해당하는 셈이다. 물론 무덤에서도 제사를 지냈는데, 이를 묘제(墓祭)라고 했다. 주로 봄과 가을에 무덤을 둘러보고 손보는 차원에서 행하는 제사였다. 그러나 대부분은 집에 사당을 세우고 그곳에 신주를 모셔 제사를 지내는 일이 더 많았다.

언뜻 사당과 법당은 다른 개념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안에 모셔진 신주와 불상이라는 두 개념을 생각해 보면 그 유사성이 쉽게 이해된다. 신주와 불상은 모두 죽음 혹은 열반 이후에 새로 갖춰진 몸인 것이다. 그에 반해 무덤은 생전의 몸을 모신 공간이 된다. 제사를 지낼 때 조상의 혼백이 임시로 머무는, 그래서 몸이 되는 실체를 말한다.

page 불상은 불교에서의 신주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불상을 모신 법당은 사당의 개념에 해당한다. 인도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당의 항마성도상(왼쪽) / 사당에 모셔지는 신주(神主)의 예(오른쪽. 사진출처 : 나무위키).

그리고 신주에는 그곳에 깃들 영혼이 누구인지 써놓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불상도 불교의례를 통해 도량에 강림하신 부처님이 머무는 임시의 몸이며, 그 안에 그 부처님에 대한 내력을 적기도 하고, 불상의 손 모양이나 보살이 쓴 보관의 모양을 통해 그곳에 깃들 부처님과 보살이 누구신지 명확히 밝히기도 한다.

따라서 원래부터 생전의 몸을 모신 무덤보다 사후의 몸이라고 할 수 있는 신주를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일이 더 많았던 동아시아에서는 굳이 불탑이 없어도 부처님을 모실 수 있는 방편을 찾아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법이 필요했을까? 무엇보다 동아시아에서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구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탑 안의 사리가 진신 사리였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고 다비, 즉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를 때 나온 많은 양의 사리를 인도의 8대 강국이 나눠 받아서 각각 스투파를 세웠기 때문이다. 보통 무덤은 한곳에 만들어지지만, 이 특이한 설화를 통해 부처님의 무덤은 여덟 곳에 무덤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부처님 열반 후 100년 뒤에 인도를 통일한 아쇼카왕이 이들 탑들을 해체하여 그 안에 있던 사리를 인도 전역의 8만 4천 개의 탑에 나눠 봉안했다고 한다. 때문에, 결국 인도의 모든 탑 안에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나온 진신 사리를 봉안한 여덟 개의 탑에서 파생된 사리들이 봉안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인도에서 이러한 진신 사리를 누군가 가져오지 않는 한 사리를 구할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탑을 세우는데 인도에서 온 스님들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러나 점차 불교가 널리 유행함에 따라 세워지는 많은 사찰의 수요에 비해 인도에서 오는 사리의 공급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아쇼카왕이 세웠다는 8만 4천 개의 탑이 세워진 장소가 점차 중국과 가까운 곳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page 일반적으로 마하보디 대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건축은 사리 대신 불상이 모셔진 마하보디 사당이다.

처음에는 스리랑카, 버마 등지에도 아쇼카왕의 진신 사리탑이 세워졌다는 것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런 곳은 인도와 매우 가까운 곳이어서 실제로 진신사리가 전해졌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거기서 더 확대되어 실크로드를 따라 감숙성, 섬서성 등지로 확대되더니 급기야는 중국의 가장 동쪽 끝인 요동성에서도 아쇼카왕이 세운 탑이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이 요동성의 아쇼카왕 탑에서 진신 사리를 찾아낸 것은 고구려 왕이었다는 기록도 덧붙여졌다. 일반적으로 마하보디 대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건축은 사리 대신 불상이 모셔진 마하보디 사당이다. 하지만 이러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전역에 세워지기 시작한 사찰들에 세워진 탑을 채울 진신 사리를 구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리를 중심으로 하는 불탑 신앙보다는 동아시아 전통의 사당 제사를 반영한 법당이 점차 사찰의 중심으로 발전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이 신주에 해당하는 불상이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물론 인도에서도 사당의 개념은 있었다. 브라만교의 신들, 즉 브라만이나 비쉬누, 쉬바 같은 신들은 태어나고 죽는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무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고, 단지 이들의 상징을 봉안하는 사당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진신사리라는 분명한 숭배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스투파를 사원과 예불의 중심으로 계속 고수했던 것이다.

이러한 불교에서도 예외적으로 보드가야의 마하보디 사당만은 예외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흔히 ‘마하보디 대탑’이라고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사리가 봉안된 탑이 아니라, 불상이 봉안된 사당이다. 이 사당은 부처님의 몸을 기리고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는 것보다도, 그 장소성, 즉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라는 점이 더 강조되었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한다면 탑으로 볼 때와 사당으로 볼 때의 시각의 차이점이 분명해진다. 탑으로 볼 때는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복을 짓는 것이 목표이지만, 사당으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사당에 강림하시길 기원하며 이를 통해 배움을 얻어 우리도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표가 된다. 이처럼 불탑과 법당, 무덤과 사당의 관계를 문화적으로 이해하면 각각의 장소에서 우리의 마음가짐도 더 분명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