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11월호

음악의 전당 6

혹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김준희 / 인천대학교 교수 -

유독 늦가을에 더 사랑받는 브람스의 음악

몇 년 전 한 방송사에서 음대생들과 클래식 음악계의 이야기를 다룬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프랑소와 사강의 소설에서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원작에서는 작가가 제목 뒤에 점 세 개(...)만 쓰기를 바랐는데 드라마에서는 물음표를 달았다는 것. 또 소설 원작을 영화화한 <Goodbye Again 이수(離愁)>에서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의 3악장이 배경에 쓰였지만, 드라마에서는 시종일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가 강조되었다는 점, 그리고 멘델스존, 차이콥스키, 프랑크 등의 낭만시대 작곡가들의 독주곡, 실내악 등이 등장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page 청년시절의 브람스

음악대학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제로 한 드라마의 제목을 정할 때, 수많은 음악가들 중 브람스의 이름을 택했다는 것은, 이미 주인공들 중 누군가는 소위 말하는 ‘고구마 캐릭터’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 가능했다. 또한 브람스라는 인물의 생애로 미루어보아 ‘쉽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이 등장할 것이라는 것도 짐작 가능했다. 베토벤이라면 근엄함과 열정을, 모차르트라면 재기 발랄함을, 리스트였다면 천재적인 카사노바의 캐릭터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브람스는 낭만주의의 한가운데 활동했던 음악가이지만 진지하고 보수적이었다. 1897년까지 살았던 브람스는 시기적으로는 거의 현대(20세기) 음악의 시기와도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극도의 화려함으로 대표되는 후기 낭만주의가 무르익어가던 시대도 신고 전파라고 불릴 만큼 절대음악을 고수해왔다. 음악에 이야기를 담아 의미를 부여하는 표제음악이 유행하던 시기에도 브람스는 소나타, 변주곡, 실내악, 교향곡 등의 음악을 고집하면서 베토벤, 멘델스존, 슈만으로 이어지는 독일 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북부 독일 출신이라 소박하고 강건한 스타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브람스의 본성이 건실했기 때문에 화려하지 않은 순수하면서도 풍부한 감성으로 정통적 낭만주의의 한 축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page 1814년의 함부르크 (Robert Bowyer, 출처 : wikipedia)

브람스는 1833년 함부르크에서 호른과 더블베이스를 연주하는 아마추어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 두 악기는 브람스의 음악 전반의 분위기와도 잘 어울린다. 그는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경제적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피아노 개인교습이나 작은 연주로 생계를 이어갔고 때때로 합창단을 지휘하며 편곡을 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은 그가 후에 합창음악을 작곡할 때 큰 자산이 되었다.

1853년 브람스는 하노버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과 연주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리스트의 소개로 슈만과 만나게 된 브람스는 새로운 인생이 열리게 되었다. 브람스의 재능을 높이 샀던 슈만과 그의 부인 클라라는 브람스를 음악계에 널리 알리고자 애썼고, 브람스는 곧 전 유럽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클라라는 후에 그녀의 일기에 슈만이 브람스를 처음 만나 그의 연주를 들은 뒤 “지금까지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는 음악을 듣게 되리라”라고 했다는 일화를 남겼다. 브람스는 슈만을 스승으로 여겼고, 동시에 클라라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page 노년의 클라라 슈만(출처 : BBC 홈페이지)

슈만이 정신병 증세로 라인강에 투신했을 때, 그들 부부를 적극적으로 도운 것이 바로 브람스였다. 막내 펠릭스를 임신 중이었던 클라라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폐한 상황이었고, 브람스가 클라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 동안 우정을 간직했다. 브람스는 계속 슈만의 아이들을 돌보면서 클라라에 대한 감정을 키워갔다. 그러나 클라라는 브람스와의 친분은 소중히 여겼지만, 남편의 제자로서만 대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브람스의 작품들 중 몇몇 곡은 우리나라의 많은 감상자들이 좋아한다. 가장 사랑을 받는 작품은 앞에서 언급한 영화 <Goodbye>에 삽입된 교향곡 제3번의 3악장이다. 애수에 찬 가을의 풍경을 잘 담은 이 곡은 한때 클래식 FM에서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교향곡’의 단일 악장으로는 가장 상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11월에 듣기에 적합하다.

<대학 축전 서곡>은 브람스가 46세가 되던 1879년, 독일 브레슬라우 대학에서 수여한 명예 철학 박사학위에 대한 답례로 작곡한 곡이다. 당시 독일 대학생들이 즐겨 부르던 학생가요 ‘우리는 훌륭한 학교를 세웠다’, ‘나라의 아버지’, ‘신입생의 노래’, ‘환희의 노래’ 네 곡을 엮어 곡을 전개한 브람스는 유쾌하고 당당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특히 마지막 곡인 ‘환희의 노래’, 일명 ‘가우데아무스’는 지성의 상징인 아카데미아 학생들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담고 있다. 이 곡을 통해 브람스는 어려운 형편에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던 아쉬움을 시원하게 풀어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사랑을 받는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은 그 주제에서도 알 수 있듯, 옛 것에 대한 완벽함을 추구하는 브람스의 음악적 성격을 만날 수 있다. 브람스는 ‘헨델의 소나타 HWV434’에서 가져온 생기 넘치는 주제를 24개의 다양한 변주로 때로는 우아하게, 때로는 정열적으로 변화시켰다. 고전적 형식 위에 바로크의 담백한 선율을 브람스 특유의 논리적인 낭만성으로 펼쳐나간 이 곡의 마지막 변주 후에 등장하는 푸가에서 그 폭발적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page 브람스의 묘, 빈 중앙공원 묘지 (출처 : wikipedia )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마도 <헝가리안 춤곡>일 것이다. 브람스가 20세 때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함께 연주를 하며 헝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민요 선율들을 모아 헝가리 춤곡집을 만들게 되었다. 이 춤곡들은 피아노 연탄(한대의 피아노에서 두 명의 연주자가 함께 연주하는 것)으로 자주 연주되고 때때로 관현악으로 연주되기도 한다. 특히 5번의 선율은 매우 유명하다. 집시 음악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이 곡들은 변화무쌍한 매력이 돋보이고 인간미가 넘친다.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은 <음악의 기쁨>에서 ‘브람스는 힘들이지 않고도 풍부한 감성을 형식의 요구에 맞출 줄 아는 작곡가’라고 했다. 브람스에게 형식은 절대적인 것이었고, 형식이 엄격할수록 음악적인 발상을 나타내는 데 수월하고, 형식을 통하여 감정을 박력 있게 드러낼 수 있었다. 브람스가 고전주의적인 형식 체계를 지키면서 낭만주의적인 정서를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브람스의 음악은 유독 늦가을에 더 사랑받는다. 중저음의 매력이 돋보이는 브람스의 음악은 진한 커피 한 잔이 떠오른다. 브람스도 실제로 매일 아침 손수 내린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쓸쓸하고 고독한 함부르크의 날씨와도 같고, 때때로 소박한 인간미와 따뜻함이 돋보이는 브람스의 음악을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권해보자. “혹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을 건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