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11월호

깨달음의 구현자, 붓다 6

자신을 지키는 법

- 이필원 / 청호불교문화원 연구소장 -

자신을 제어하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가 된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경험의 축적이 그 사람의 성격이 되고,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습이 된다. 보통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자신을 지키고자 나름의 방식을 만들게 된다. 그 방식 가운데 ‘힘’을 갖는 것을 가장 선호하지 않을까 싶다. ‘힘’을 만드는 것은 권력을 갖거나, 막대한 부를 갖거나, 범접할 수 없는 재능을 갖거나, 아니면 폭력을 행사는 방식들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힘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고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그 힘을 동경하고, 힘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나와 나와 관계있는 사람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통해 ‘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것이 확실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배운다. 동서양의 근현대사만 갖고 보더라도 독재자들은 그 끝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가 죽을 때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권좌에 있었을지라도, 역사의 평가에서 그들이 좋게 평가되는 경우는 없다. 공자는 정명(正名)사상을 이야기했다. 그 이름을 영예롭게 하는 것, 그것이 효의 궁극이라고 표현했다. 좋은 이름을 남기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타인들이 나의 삶을 찬탄하고, 그 이름을 소중히 생각해 주는 것은 권력으로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기에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선조를 인조와 더불어 조선조 최대의 암군(暗君)이라고 부르고, 이순신 장군을 성웅(聖雄)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다. 선조는 부끄러운 이름을 남긴 것이고, 이순신 장군은 만고에 빛날 이름을 남긴 것이다. 그럼,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 ‘나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을까. 『담마빠다(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가르침이 나온다.

자기가 사랑스러운 것을 알면 자기 자신을 잘 수호해야 한다.
현명한 님이라면 세 시기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자신을 살펴야 하리.(Dhp.157)

page <Chat GPT>로 그린 그림

세상에서 누가 가장 사랑스러운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어떤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과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까? 자식을 말할 수도 있고, 부모님을 말할 수도 있고, 연인을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꼬살라국의 왕 빠세나디왕이 어느 날, 말리까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는 세상에서 누가 가장 사랑스럽습니까?” 이 질문을 받은 왕비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제가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은 바로 저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서운하지 않았을까? 왕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을까. 그런데 왕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 역시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왕과 왕비는 부처님을 찾아뵙고, 이 이야기를 전해 올리자, 부처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내가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것도, 부모가 자식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것도, 연인이나 자식이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내가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렇게 헌신하는 것이 ‘나에게 이롭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에게 행복’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 행동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나’를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수호자이니 다른 누가 수호자가 되랴.
자신을 잘 제어할 때 얻기 어려운 수호자를 얻는다.(Dhp.160)

우리는 힘을 얻어서 ‘나’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나를 잘 제어할 때 ‘나’를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고통은 ‘통제되지 않는 욕망’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권력이나 부, 물리적 힘 등은 모두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권력이나 부 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압도당해 그것들의 노예가 될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권력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는 자가 권력을 잡게 되면, 마치 자신이 신이 되는 양 행동하게 된다. 제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권력을 행사한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라는 독선에 빠져, 자신만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까지 불행하게 만든다. 권력의 힘을 견디지 못하는 자가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권력이나 부의 힘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제어하는 힘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욕망의 노예가 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시키는 대로 무비판적으로 행동한다. 노예는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면 된다. 노예가 생각하고 판단하면 안 된다. 그처럼 욕망이 주인인 사람은 욕망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먹으라면 먹고, 마시라면 마신다. 자라면 자고,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하면 죽인다. 이것은 가장 사랑스러운 ‘자신’에게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다고 하면서, 그 행동을 보면 마치 원수에게나 할 짓을 자신에게 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page <Chat GPT>로 그린 그림

부처님이 『담마빠다』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루에 적어 한 번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잘 관찰하여, 자신을 원수처럼 대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훌륭하게 지켜내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깨달은 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원수로 대하지 않고, 정말 사랑스럽게 대하는 삶을 산다. 부처님의 삶은 바로 그러한 삶의 표본이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걸어갈 때에도 우리가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따라 한다면, 그것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훌륭하게 지켜내는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