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호웹진 11월호

심리이야기 6

행복 가운데 으뜸의 행복은 ‘불·행(佛幸)’

- 김세곤 / 청호불교문화원 상임이사 -

page 마곡사 백범관 김구선생 글씨

행복 가운데 으뜸의 행복은 ‘불·행(佛幸)’

요즘에는 SNS로 전하는 인사법이 낯설거나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앙증맞고 흥미로운 다양한 그림판 이모티콘 앱들이 많이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본인이 직접 손으로 삽화나 그림을 그려 넣지 않고서도 그런 앱들을 첨부하여 근황을 묻거나 상황을 전할 수 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마치 황금처럼 소중했던 지난번 장기간의 추석 연휴 동안에도 모바일폰으로 명절 안부 인사를 전하는 디지털 방식의 인사법이 성행하였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같은 명절 인사법의 문구가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즉 줄여서 건∙행 하세요!’라는 메시지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TV 방송에서조차 ‘건∙행 하세요!’라고 인사말을 하는 연예인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건강과 행복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소중하고, 그래서 그에 대한 욕구와 소망 또한 크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흔히 건강은 크게 정신적인 측면과 신체적인 측면으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두 측면 모두가 균형감 있게 튼튼하고 온전해야 생명을 지키고 유지하며 나아가 사회적 성공, 명예나 존엄까지도 잘 영위할 수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건강하고 싶은 인간의 욕구와 그 기대는 가장 기본적이며 생리적인 욕구 수준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본주의 심리학자인 매슬로도 자신의 ‘욕구 5단계 계층 이론’에서 생리적(기본적)인 욕구를 어느 정도까지 충족시켜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안전의 욕구)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궁극에는 최종 단계인 자기실현의 욕구 단계로 발전되고 종국에는 그 자기실현의 결과로서 더욱 충만한 인간적·영적인 삶의 질(행복감)이 잘 유지되고 지속 가능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이란 단계별 충족(욕구 달성도)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매슬로의 이론에 기초하여 健·幸(건강과 행복)과 安·幸(안전과 행복)의 의미, 끝으로 궁극의 행복이라 할 수 있는 ‘佛·幸(불교와 행복, 즉 佛法僧 三寶에 귀의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행복)’의 의미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 보고자 한다.

Ⅰ.매슬로의 욕구 이론과 「건·행(健幸)과 안·행(安幸)」의 의미

여기서 ‘건·행’이란 건강과 행복의 축약어이고, ‘안·행’이란 안전과 행복을 축약한 俗語임을 우선 밝혀둔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행복을 삶 또는 인생의 기본 목적이나 목표로 생각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래서일까 행복하세요! 혹은 福 많이 받으세요! 라는 인사가 새해 아침 명절날 흔한 인사말로 사용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복과 행복의 개념은 다소 차이가 있다. 하지만 대개 그 둘은 유사한 의미와 용도로 잘 통용되고 있다. 그런데 평소에 일상에서 늘 사용하고 있는 행복이란 단어가 과연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어떻게 하면 진정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지? 와 같은 물음에서처럼 좀 더 근본적이고 보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다 보면 그 답이 여간 만만하지 않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가령 일반 서점에 가보면 『행복론』이란 제목의 책이 가판대에 참 많이 진열되어 있기도 하지만 막상 읽고 이해해 보려고 하면 여간 만만하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행복론에 관한 책들의 대부분은 아마도 어떤 철학적 문학적 종교·심리적 차원의 깊은 사유물이거나 혹은 저자의 학문적 입장에서 매우 정치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암튼 이런 현상들을 보면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복 혹은 행복이라고 하는 단어의 의미를 그저 단순하게 취급하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여기서는 건·행이란, 즉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 그 자체가 행복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또 한 안·행의 경우도 즉 안전한 심리적 정서적 신체적 상태(환경) 그 자체가 곧 행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매슬로의 욕구 5단계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건강에 대한 욕구는 생리적 수준, 즉 가장 기본적인 욕구 수준에 가깝고 안전에 대한 욕구는 그다음 단계인 안전에 대한 심리적 욕구 단계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안전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로 충족되어 달성되면 그다음 단계인 애정과 공감의 욕구와 사회적 존경의 욕구, 그리고 자기실현의 욕구 단계로 점차 적으로 단계를 밟아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요컨대 매슬로의 욕구 위계설 이론에 비추어 행복의 의미를 연관 지어 보면 다양한 수준의 욕구가 그 단계별로 충족될 때마다 행복감을 느끼면서도 또 다른 차원의 욕구가 이어지게 되고 종국에는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욕구 수준, 즉 그런 기대와 방향으로 상승하여 나아가게 됨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개인의 생리적 욕구에서 시작하여 사회적 욕구로 나아가 종국에는 眞善美에 대한 욕구, 즉 영적 종교적 차원의 욕구, 자기 초월의 욕구로 나아감을 알 수 있다. 건강을 잘 지키고 유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행복감, 안전을 지키고 보장받는 차원에서 초래되는 행복, 사회적 성공 혹은 타인으로부터 존중을 받는 위치에서 나타나는 행복감도 정말 중요하고 소중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최종 단계라고 하는 자기실현이나 초월의 욕구 단계에서 나타나는 궁극의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생을 마감하는 임종의 그 순간까지도 死後의 미지 세계에 대한 불안과 공포감은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자기실현의 완성과 유사한 궁극의 행복을 누리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page 마곡사 경내 김구선생 글씨

Ⅱ. 궁극의 행복은 “불행(不幸)을 ‘불·행(佛幸)’”으로 바꾸어 보려는 마음가짐에서부터

일상에서는 행복의 반대말을 불행(不幸)이라고 한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궁극의 행복은 불·행(佛幸)에 있다고 하니!!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유머감이 넘치는 자의적인 표현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그런데 잠깐만! 여기서 말하는 ‘불·행(佛幸)’이란 한마디로 ‘佛道(佛法)의 진리를 배우고 자각하여 실천함으로써 발견하는 진정한 행복을 의미’ 한다고 임의의 정의를 내리고자 한다. 말하자면 앞서 언급한 매슬로의 자기실현 달성의 단계에서 얻게 되는 어쩌면 궁극적이며 영적으로 심원한 행복에 이르는 최상의 행복한 경지와 유사하게 생각해도 좋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행복감은 객관적인 기준으로도 측정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다소 주관적인 개념의 성격이 강하고 특히 주체적·실존적 차원의 측면이 더 많이 작용하기 때문에 개개인의 궁극적인 행복감 또는 행복관을 말할 때는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왜냐면 각 개인의 행복관은 그 개인이 지닌 가치관과 인생관(주체성 가치관 사회관 국가관 우주관 심지어 종교관 등)이 모두 총동원되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합리적(이성적)인 과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매슬로의 욕구이론은 객관적·실용적인 차원의 행복을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말하자면 평소 일상적인 삶과 생활 속에서 건강과 안전, 사회적 성공이나 부의 성취, 사회적 존경과 명예를 얻고 잘 유지함으로써 누리게 되는 행복감도 주어진 현실 앞에서는 전혀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이나 질병, 노화와 같은 자연현상에서 비롯되는 근원적인 고통, 불안,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앞서 언급한 욕구이론과 같은 학문적 차원의 접근만으로는 풀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말하자면 生老病死와 같은 인간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과제들을 풀지 않고서는 궁극의 행복을 이루기가 어렵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인간의 근원적인 고통은 어디서 시작되고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또 어떻게 하면 그 근원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의 길에 이를 수 있는지? 에 대한 깊은 통찰과 혜안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니르바나(涅槃)라고 하는 궁극의 행복론을 몸소 깨달아 중생을 제도하신 ‘붓다의 행복론’ 즉 불교의 행복론(불행, 佛幸)으로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으로서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칭할 만큼 방대한 분량의 심오한 불교 경전을 배우고 이해하는 일은 여간 만만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生老病死에 대한 고통을 끊고 진정으로 영원한 행복을 구하려면 우선 三寶(佛法僧)에 귀의하여 열심히 수행정진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釋尊께서도 궁극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 그 화려한 왕궁 생활을 버리고 출가 고행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시어 不退轉의 정진 수행으로 해탈에 이르셨다고 하는 역사적 사실은 ‘불교 행복론’에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고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붓다께서는 중생들이 근원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궁극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八正道)까지도 제시하셨는데 이 교리는 四聖諦(苦集滅道라고 하는 4가지의 성서로운 진리의 말씀)원리와 함께 佛·幸(불교행복론)을 이룰 수 있는 소중한 가르침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평소 우리는 ‘空手來空手去’란 문구 하나만 들어도 부질없는 집착과 욕심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 아름답고 청명한 가을날! 소리 없이 바람에 나부끼는 단풍잎 하나만 바라다보아도 순간이나마 자연의 섭리를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어쩌면 일상의 자연 몰입과 사색만으로도 이미 ‘소확행’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불행(不幸)을 ‘불·행(佛幸)’으로 바꿀 수 있는 자격을 이미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立冬의 문턱에서 행복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는 ‘불·행(佛幸)’의 세계로 나아 가보지 않겠습니까!